30년 정상을 지키는 신비주의의 표상 장미희 [김상근의 스타앨범]
2013. 05.09(목)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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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브이데일리 윤상길 편집위원] 한 세대가 가슴이 뜨거웠던 청춘의 시대를 지나 기성세대가 되면 자신의 청춘을 추억하기 마련이다. 과거는 돌아가지 못할 시간이라는 점에서 누구나에게 아쉽고 애틋하다. 하지만 추억이란 햇살과 함께 사라지는 이슬이 아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만나는 숱한 사연을 계기로 다시 반짝인다. 젊은 시절, 우리 가슴을 뛰게 만들었던 그 시절 톱스타의 모습은 우리의 추억을 되살리는 계기로 충분하다.

50대 중반에 이른 여배우 장미희의 그 옛날 모습도 추억의 불씨가 된다. 장미희는 유지인, 정윤희와 함께 8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를 이끌었다. 이들은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를 관통하며 10여년간 스크린과 안방극장에서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장미희는 1975년 TBC(동양방송) 특채탤런트로 뽑혀 1976년 박태원 감독의 신인배우 공채 모집에서 276:1의 경쟁률을 뚫고 영화 ‘성춘향전’의 주인공 ‘춘향’ 역에 발탁되면서 스크린에 데뷔하였다.

1977년 영화 ‘겨울여자’(감독 김호선)에서 청순가련한 이화 역을 맡아 대스타로 발돋움했다. 당시 ‘겨울여자’는 서울 단성사에서 단관 개봉돼 58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이 기록은 1990년 ‘장군의 아들’(감독 임권택) 전까지 깨지지 않은 대기록이었다.

이후 장미희는 지적이면서도 고고한 이미지로 영화 ‘적도의 꽃’, ‘깊고 푸른 밤’, ‘불의 나라’ 등에 출연하면서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여배우로 전성기를 누렸다. 그는 TBC 연기대상 최우수 여자연기상, 영화평론가협회상, 아시아태평양영화제, 대종상, 청룡영화상 등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애니깽’, ‘보리울의 여름’ 등에 출연했으나 영화 출연 횟수는 많지 않았고 TV드라마 출연에 주력하고 있다. 지난해 비속어 남발로 화제가 됐던 SBS ‘패션왕’에 이어 현재는 MBC 일일극 ‘오자룡이 간다’에 출연 중이다. 후진 양성에도 힘써 1998년부터 명지전문대학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장미희는 트로이카 중에서 매스컴의 주목을 가장 많이 받은 배우이다. 당시는 ‘주간중앙’ ‘선데이서울’ ‘주간경향’ 같은 대중 주간지 전성기였는데, ‘나 오늘 한가해요’ ‘스타의 망중한’ 같은 화보에는 상대적으로 정윤희 유지인이 자주 등장했고, 기사의 주인공으로는 단연 장미희가 으뜸이었다. ‘사건 있는 곳에 기자가 있다’였으니, 장미희를 둘러싼 이야기는 늘 세인의 관심거리였던 모양이다.

“아름다운 밤이에요.”는 장미희 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말이다. 코맹맹이 소리로 뒤끝을 야릇하게 꼬아낸 이 말은 전 국민의 유행어가 되었다. 1992년 대종상 시상식에서 ‘사의 찬미’로 여우주연상을 받으면서 수상소감으로 꺼낸 첫마디이었다. 이 로맨틱한 한마디는 이후 수많은 연예인이 수상식에서 차용, 웃음을 안겨주었다.

장미희 ‘따라하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똑 사세요”이다. MBC 드라마 ‘육남매’(1998년~2000년)에서 떡 장사를 연기한 장미희가 외치던 말이다. 물론 연출된 대사이지만, 장미희의 열연에 힘입어 장안의 유행어가 되었다. 훗날 여러 연예인이 이를 따라 했는데 개그우먼 이경실의 따라하기가 최고였다. 하지만 이 풍자를 싫어한다는 장미희의 반응에 후배 연기자들이 지금은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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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장미희가 뉴스메이커였던 이유는 그가 ‘신비주의’ 캐릭터를 고수해왔기 때문이다. 비밀이 많은 사람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대중은 끊임없이 스타에게 질문을 던진다. 인생관이나 예술관 같은 거창한 것에서 사소한 일상사까지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한다. 그러면 스타는 직접 또는 소속사를 통해 제기된 의문에 적극 대처한다. 하지만 장미희는 좀 다르다. 출연 작품에 관한 질문 이외에는 거의 노코멘트로 일관한다. 의도된 것이건 아니건 간에 초지일관 신비주의 전략을 구사한다. 대중의 궁금증은 더해지고,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무성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연예계 데뷔 38년차에 이른 현재까지도 장미희는 다른 여자 연예인에 비해 사생활 노출을 꺼리는 편이다. 기본적 신상정보마저 대중에게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톱스타라면 당연히 알려질 만한 것들, 예를 들자면 생년월일, 가족관계, 학력 같은 것들조차 똑 부러지게 밝혀지지 않아 팬들을 안달 나게 했다.

포털사이트 네이트에는 장미희의 생년월일이 1958년 1월 27일, 무비스트 같은 일부 영화 관련 사이트에는 1957년 12월 8일생으로 기록되는 식이다. 기록이 다른 점을 두고 양력과 음력 표기의 차이란 사람도 있고, 처음에는 57년생으로 알려졌으나 학력 위조 사건이 일어난 2007년 이후 사법당국의 조사가 이뤄지는 과정에서 1958년생으로 정정됐다는 견해도 있다.

장미희의 신비주의 전략의 압권은 2007년에 일어난 학력위조 파문이다. 당시 각종 프로필에는 장미희의 학력이 장충여고, 동국대 철학과를 거쳐 미국 호손대에서 교육학 학사, 명지대 교육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 것으로 나타나 있었다. 하지만 그 어느 하나 제대로 확인되지 않고 의혹만 키웠다.

그가 졸업했다는 장충여고는 1972년 야간학교로 설립돼 1년만에 폐교, 졸업생이 아예 없다는 것으로 밝혀졌다. 동국대에는 아예 학적이 없었으며, 명지대 교육대학원 석사과정과 명지전문대 교원 임용 때 장미희가 교육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고 기재한 호손대는 개방대로서 학사학위가 통용되지는 않는 미인가 대학이었다.

의혹이 불거졌지만 장미희는 여전히 신비주의 캐릭터를 유지했다. 언론사의 입장 표명 요구에 묵묵부답, ‘모르쇠’로 일관했다. 일부 언론에 “이 사회에서 학력 콤플렉스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학력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만한 아량도 없나”라고 선문답하듯 던진 말이 전부였다. 이 의혹은 검찰의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이란 판단에 따라 유야무야 되었는데, 신비주의적 결백 입증(?)의 사례로 꼽힌다. 그는 여전히 대학교수로 강단에 서고 있으며, 대중은 곧 이 사실을 잊고 있으니 말이다.

그가 50대 중반 나이에 이르기까지, 독신을 고집하는 이유도 대중이 궁금해 하는 부분이다. 지난 2011년 4월 장미희는 한 대학의 초청 강의에서 “어릴 때 선생님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배우가 된 이후 여러 가지 갈등과 좌절도 맛보았으나 연기자로서, 학생들에게 연기를 가르치는 교수로서 지금은 후회는 없다”라고 심경을 밝혔다.

여기에 나타난 갈등, 좌절, 루머, 구도자 같은 단어들은 그의 인생이 결코 평탄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장미희는 지금도 말을 아끼며 산다. 자신의 사생활과 관한 어떠한 질문에 해명도 변명도 않는다. 언론이 ‘알권리’를 내세워 집요하게 공략해도 꿈쩍 않는다.

그를 보노라면 중국 후당(後唐) 시대 뛰어난 처세술로 이름을 떨친 정치가 풍도(馮道)가 연상된다. 풍도는 ‘구시화지문, 설시참신도’(口是禍之門, 舌是斬身刀)라고 하였다. “입은 재앙의 문이고, 혀는 몸을 자르는 칼이다”란 말이다. 장미희의 더 큰 나를 만들기 위한 변화와 도전은 현재진행형이다. 그 중심에 ‘신비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티브이데일리 윤상길 편집위원 news@tvdaily.co.kr / 사진=사진작가 김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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