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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뷰] '1987' 그때 그 시절의 함성, 가장 위대한 전율
2017. 12.27(수) 09:35
영화 1987 리뷰
영화 1987 리뷰
[티브이데일리 한예지 기자] 한 사람이 죽고 모든 게 변화했다. 오랫동안 비열한 권력에 참혹하게 짓밟혀 숨죽여 있던 이들의 내면 깊은 곳에, 이토록 뜨겁고 처절한 울분이 들끓고 있었다. 우리 모두가 주인공이던 1987 그 거리, 그때 그 시절 우리의 함성은 이렇게나 위대했다고.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격하게 치밀어 오르는 감상을 도무지 주체할 길이 없다. 영화 '1987'이다.

12월 27일 개봉된 영화 '1987'(감독 장준환·제작 우정필름)은 故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사건으로 시작된다. 소름이 쭉 끼치는 더럽고 음습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한 서울대생이 물고문과 폭행을 당해 사망했다. 쓸데없는 일에 왜 호들갑이냐는 대공수사처 박 처장(김윤식)은 시신을 화장해 증거 인멸할 것을 지시한다. 검사 보기를 속된 말로 '똥같이'하는 대공분실 인간들에 적잖이 뿔이 나 있던 서울지검 공안부장 최 검사(하정우)는 공연히 호기를 부리며 부검을 밀어붙인다.

안기부장(문성근)과 치안본부장(우현)의 든든한 '빽' 믿고, 일이 잘 풀릴 줄 알았는데 '똥개 검사' 최 검사가 자꾸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진 덕분에 일이 마구 꼬인다.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황당무계한 답변을 내놨지만 언론은 보도지침을 어기고 자꾸만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려 한다. 박 처장은 심복인 조반장(박희순) 등 2명에 대신 죄를 덮어쓰라 지시하지만 사건이 점점 꼬이는 바람에 제 목숨줄이 위험해진다. 사건을 은폐하려 하면 할수록, 진실을 캐내려는 이들이 많아지고 결국 국민들은 천인공노할 공권력의 비민주성과 부패성을 강력하게 규탄하며 거리로, 수없이 쏟아져 나온다. 그 시절의 함성은 스크린을 찢고 나올 듯 거대한 장관을 연출한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에서 이한열 열사의 죽음으로 이어진 1987년, 6월 항쟁의 뜨거웠던 실화를 담은 영화 '1987'은 역사적으로 무겁고 진중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스토리를 풀어내는 표현 방식은 힘 있고 드라마틱하며 위트마저 넘친다. 충격적인 코미디 SF 영화 '지구를 지켜라'로 데뷔해 천재 감독의 탄생을 알렸고, '화이:괴물을 삼킨 아이'로 독창적 스토리 라인의 하드보일드 범죄 스릴러를 완성했던 장준환 감독. 그는 특유의 놀랍도록 기발한 연출력을 거대한 역사적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에도 충분히 녹여낼 수 있음을 입증했다.

'1987'은 일대 다자의 인물 구도를 따라가는 스토리라인이 매우 흥미롭다. 대부분의 영화들은 한 명의 주인공이나 주요 캐릭터를 내세워 그의 감정선을 따라가며 보편적인 서사를 그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1987'은 일그러진 애국심과 광기 어린 신념이 발현된 인물인 박처장이 극을 장악하는 절대악의 존재로 극을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이에 맞서 '똘끼' 가득한 능청스러운 최 검사를 시작으로 서슬 퍼런 보도지침에도 진실을 파헤치는 윤 기자(이희준), 수감 중인 민주화 재야인사 이부영(김의성), 조작된 간첩단 사건으로 인해 수배 중인 민주화 재야인사 김정남(설경구), 서신을 전달하는 소시민 교도관 한병용(유해진), 그의 조카인 87학번 신입생 연희(김태리)를 비롯해 수많은 인물들이 마치 릴레이처럼 이어지며 절대악과의 사투를 벌인다.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시위하는 학생들을 몰래 숨겨주는 상인, 치안본부장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부검 결과를 밝히는 부검의, 두려움에 맞서 원칙을 요구하는 교도소장, 언론의 신념을 지키는 사회부장 등등 이름 모를 극 중 수많은 이들이 수행한 각자의 역할은 종국엔 하나로 이르러 큰 역사의 물결을 만들어낸 파도 같은 의미로 귀결된다. 이는 '모두가 주인공이었던 1987'이란 영화의 슬로건을 완벽히 충족하는 장치적 기능으로서도 큰 의미가 있다. 이처럼 극의 흐름은 비록 낯선 구조를 취하고 있지만, 수많은 인물들이 극을 촘촘히 메꾸며 생동감을 더하고 익히 알려진 실화 사건임에도 속도감과 극적 긴장감을 극대화하며 영리한 몰입도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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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1987'이 영화적 가치를 높인 건, 상업영화의 본성을 지키면서도 1987년 당대의 사회 현실과 역사를 섬세하고 치밀하게 반영하며 사회적 기능을 수행한 데 있다. 특히 '1987'은 가슴 아픈 역사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지켜야 할 기본 예의, 피해자들을 향한 위로와 고통의 절감이 뼈아프게 기록됐다. 절대 악인 박 처장은 한국전쟁을 겪으며 갖게 된 이념에서 발현된 트라우마가 왜곡 변형되며 괴물같은 애국심을 갖게 된 인물이란 전사가 분명하지만, 이에 대한 관객의 이해를 구하려는 시도는 일절 없다. 오히려 그가 제 부하들을 인간적으로 대하거나 그들의 행위가 애국심에서 비롯됐다며 쉼 없이 주입시키는 행위는, 당위성을 주기보다 절대악의 공포를 부각하는 장치로 사용될 뿐이다.

그리고 자식의 죽음이 은폐되는 과정에서 가혹한 핍박을 당하는 유족들의 모습을 외면하지 않았다. 조카의 부검 상황을 핏발 선 눈으로 지켜보던 삼촌(조우진)이 내뱉는 피맺힌 절규, 내내 허망하게 영정사진만 들고 있던 아버지가 얼어붙은 강 위에 뿌려진 자식의 뼛가루를 맨손으로 쓸어 모으며 왜 가질 못하고 있느냐며, 아버지는 할 말이 없다고 목구멍을 치받치는 오열을 토하는 모습은 분개와 통탄을 금치 못하게 했다.

이밖에도 아무 잘못 없이 끌려가 끔찍한 고문을 당하거나, 애써 외면하던 현실을 마주하고 눈물을 터뜨리는 학생, 자신 또한 무섭고 겁나지만 마음이 아파서 두고 볼 수가 없다며 속내를 털어놓는 이들까지. 그 시절 존재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담담히 그려냈기에 가슴 쓰린 감상과 비애가 가득히 스며든다. 그럼에도 외모 때문에 늘 검문을 당해 멋쩍어하는 교도관, 삼촌과 마이마이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는 철부지 명랑 여대생, 부끄러운 줄 알라는 기자의 외침에 심드렁하게 일관하다가도 슬쩍 정보를 남겨놓고 유유히 떠나는 검사의 뒷모습 등등. 마냥 암울하고 비관적이지만은 않은 그 시절 보통 사람들의 정겨운 향취는 소소로운 웃음을 자아낸다.

이처럼 '1987'은 평범한 사람들의 용기로 괴물 같은 악인을 무너뜨리고 기어코 승리를 쟁취한, 우연 같은 필연의 역사를 담아냈다. 더불어 영화는 세대 간 갈등과 이념 갈등이 극단적 양분화로 치달은 작금의 사회에서 과거의 '우리' 또한 이토록 치열하고 순수한 불꽃을 피워 올렸음을, 또한 지금의 '우리' 역시 위대하고 아름다운 희망을 가졌음을 말하고자 한다. 배역의 비중에 상관없이 극에 녹아든 수많은 배우들의 열연은 뜨겁고 위대했던 그때 그 시절을 완성하는 화룡점정이라 해도 좋다.

[티브이데일리 한예지 기자 news@tvdaily.co.kr/사진=영화 '1987' 포스터,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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