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차드 3세', 연극이 배우의 예술인 이유 [리뷰]
2018. 02.12(월) 16:27
연극 리차드 3세 황정민 메인 티저
연극 리차드 3세 황정민 메인 티저
[티브이데일리 연휘선 기자] 흔히 대중문화의 장르를 구분할 때 영화는 감독의 예술, 드라마는 작가의 예술, 연극은 배우의 예술로 통한다. '리차드 3세'는 왜 무대가 배우의 공간인지 보여주는 작품이다. 장면 하나하나가 출연진의 아우라로 가득 차 있다.

'리차드 3세'(연출 서재형)는 영국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쓴 동명 희곡을 원작으로 한 연극이다. 꼽추였지만 총명했던 요크가의 마지막 왕 리차드 3세의 광기 어린 폭주를 그린다. 영화 '국제시장'과 '베테랑'으로 '쌍천만' 배우에 등극한 황정민이 타이틀 롤 리차드 3세를 맡아 10년 만에 선택한 작품이다. 또 정웅인 김여진 김도현 박지연 정은혜 이갑선 등 쟁쟁한 배우들이 원 캐스트로 출연한다.

공연은 텅 빈 무대 위 고고하게 버티는 왕좌를 조명하며 시작한다. 중세 영국, 왕좌의 주인은 요크 가문의 에드워드 4세다. 그에 의해 무너진 랭커스터 가문의 마가렛 왕비는 자신의 가문을 몰락시킨 요크 가를 향해 저주를 퍼붓는다. 그 중심에는 에드워드 4세의 둘째 동생이자 랭커스터 가문의 왕과 왕자를 죽인 리차드 3세가 있다.

곱사등이에 절름대는 발, 굽은 손을 가진 리차드 3세는 비참한 외모 때문에 한 번도 주위의 사랑을 받은 적 없다. 그는 큰 형 에드워드 4세와 요크 가문이 칭송받는 와중에도 남루한 외모 때문에 철저하게 무시당한다. 앙심을 품은 리차드 3세는 자신을 배척했던 사람들에게 착한 척 정체를 감춘 뒤, 형제는 물론 어린 조카들까지 제치고 요크 가의 새로운 주인이 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리차드 3세의 계략은 극 전반을 지배하며 시종일관 음산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특히 그는 세치 혀로 각종 거짓말을 꾸며내 정적들을 죽인다. 왕의 사형 집행장을 위장해 형 조지를 죽이고, 늙고 병든 에드워드 4세는 동생을 죽였다는 비통함에 빠져 죽게 한다. 이어 형수 엘리자베스 왕비의 동생들을 암살한 뒤, 뛰어난 재상 헤이스팅스도 역모로 몰아 죽인다. 급기야 그는 에드워드 4세의 아들들인 어린 조카 황태자와 요크 왕자까지 암살하며 유일한 요크 가문의 남자로 왕관을 쓴다.

왕좌를 차지한 뒤에도 리차드 3세의 욕망은 멈추지 않는다. 그는 정통성에 문제가 되자 조카딸 엘리자베스와 혼인하려 아내 앤마저 죽인다. 이로써 극은 셰익스피어 작품 중 가장 문제작으로 평가받는 원작을 충실하게 재현한다. 거듭된 거짓말과 살인, 폭주하는 권력욕 등 '리차드 3세'는 리차드 3세를 통해 인간의 가장 추악한 욕망을 조명한다.

티브이데일리 포토


황정민은 이 혼돈의 도가니에서 무게중심을 잡는 배우다. 그의 인지도가 공연을 주목하게 하고, 연기가 시선을 무대에 유지하게 만든다. 그는 가긍한 척 웅크렸다가, 위엄 있는 척 허리를 폈다가 리차드 3세의 위세에 맞춰 시시각각 몸짓을 바꾼다. 움츠러든 등에 일그러진 얼굴, 수전증이라도 걸린 듯 떨리는 손짓 그리고 비틀어진 발까지. 황정민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동원해 원작 속 리차드 3세를 표현한다. 그는 인터미션도 없는 러닝타임 100분 내내 분장도 아닌 연기로 뒤틀린 인물을 소화하며 감탄을 자아낸다.

무엇보다 황정민은 버림받은 왕자였다가 위선자였다가 악마 같은 왕이 되는 리차드 3세의 감정을 탁월하게 표현한다. 때로는 방백으로 때로는 독백으로 때로는 대사로, 출연진은 물론 객석과 호흡하는 그의 모습은 관객으로 하여금 뒤틀린 악인 리차드 3세에게 몰입하도록 만든다. 나아가 인간의 욕망 자체에 집중해 선과 악의 가치를 뒤흔들고, 끔찍한 살인자임이 분명한 이 주인공을 가련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나의 죄를 묻는, 그대들의 죄를 묻겠다"는 마지막 대사와 함께 땅으로 꺼지듯 퇴장한 리처드 3세의 엔딩은 유독 허무하다. 그 공허함은 곧 황정민의 존재감이 '리차드 3세'를 가득 채우고 있다는 방증이다.

음산한 저주로 마가렛의 비통함을 자아내는 정은혜, 에드워드 4세의 오열로 존재감을 발산한 정웅인, 간신 버킹엄으로 얄미울 정도로 찰떡같은 처세를 보여준 김도현, 비운의 왕비로 어머니의 감성을 소화한 김여진 등 다른 배우들의 활약도 마찬가지다. '리차드 3세'에서는 무대 뒷면의 스크린과 좌우를 감싼 철창 외에 침대, 식탁, 왕좌 등 간단한 소품이 전부다. 화려한 특수효과가 즐비한 최근 공연계에서 이 작품의 연출은 미니멀리즘의 극치를 보여준다. 대신 극은 배우 한 명 한 명의 연기와 감정으로 가득 찬다. 3면으로 둘러싸인 이 무대의 주인공은 오직 배우들이다. 보이지 않는 제 4의 벽을 앞에 둔 관객이 할 수 있는 건 그 위압감에 압도되는 것뿐이다.

티브이데일리 포토


'리차드 3세'는 다음 달 4일까지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 소재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공연된다.

[티브이데일리 연휘선 기자 news@tvdaily.co.kr / 사진제공=샘컴퍼니]
기사제보 news@tvdaily.co.kr        연휘선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키워드 : 리차드 3세 | 연극 | 황정민
싸이월드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