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N번방, 손석희 김유빈 보다 중요한 것 [이슈&톡]
2020. 03.26(목)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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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브이데일리 김지현 기자] 그곳에 지옥이 있었다. 역대 최악의 미성년자 성착취 범죄로 기록될 텔레그램 ‘N번방’에서 어린 소녀들은 공포에 온몸을 떨어야 했다. N번방 운영자로 알려진 박사, 조주빈의 범죄 행각을 열거하는 일 조차 힘든데 어찌 피해자들의 고통을 가늠할 수 있으랴. 우리가 조주빈에게, N번방 26만 명의 유저들에게 분노하는 이유는 피해자들이 느낀 공포가 그럼에도 내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그 지옥에 있을 수 있었다.

조주빈은 악마도, 사이코패스도 아니다. ‘일반인과 다른 뇌를 가졌기 때문에’와 같은 말은 범죄를 합리화하는 수식어로 통용될 뿐이다. SNS에 한창 '범죄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는 해시태그 운동이 일었다. 일리 있는 말이다. 조주빈이 극보수인지, 진보주의자인지 중요치 않다. 봉사활동 여부 따위도 그렇다. 집중해야 하는 건 그의 범죄를 입증하고, 관련자를 철저히 추적하고, 비슷한 사건의 판례에 의존하지 않는 엄중한 처벌을 내리는 일이다.

조주빈이 해당 범죄로 얻은 수익은 100억 원대로 추정된다. 그의 얼굴을 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철저하고, 지능적인 범죄 행각을 보였던 그는 포토라인에서도 철저히 계산된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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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희 사장님, 윤장현 시장님, 김웅 기자님을 비롯해 저에게 피해를 입은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사죄합니다.”

성범죄 피의자 사상 최초로 신상 공개가 결정된 용의자의 입에서는 엉뚱한 이름들이 튀어나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 사람은 N번방 사건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 N번방 사건의 최대 가해자로 지목된 조주빈이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할 이들은 그가 일명 ‘노예’라고 불렀던 미성년자 피해자들이었다. 사실상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는 없던 것이다.

조주빈이 사건과 무관한 세 사람의 이름을 언급한 이유는 뭘까. 제 신상이 낱낱이 공개되고 국민적 분노가 쏟아지자 그 관심을 다른 이들에게 돌리기 위한 의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바람은 단번에 실현됐다. 손석희 전 앵커는 JTBC를 통해 입장을 발표했고, 사람들은 손 전 앵커가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상상력을 발휘하며 입방아를 찧고 있다. 조주빈의 계획이 적중한 것이다.

같은 날 또 다른 제3의 인물이 도마 위에 올랐다. 아역배우 김유빈(16세)이 SNS에 남긴 글이 문제가 됐다. "남성들이 뭐 씨X. n번방을 내가 봤냐. 이 X창X들아. 대한민국 창X가 27만 명이라는데 그럼 너도 사실상 창X냐. 내가 가해자면 너는 창X다“라는 내용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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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불쾌한 글이다. 본인과 가족이 나서 사과를 했음에도 충분히 비판받을 만하다. 그러나 현재 벌어지는 상황이 과연 정상적일까. 이틀째 김유빈은 조주빈의 이름 석자 보다 더 포털사이트 검색어 상위에 랭크돼 있고, 매체들은 그의 발언이 ‘국민적 공분’을 샀다고 비난하고 있다. 양일간 조주빈 만큼의 기사량이 쏟아지는 중이다. 사건의 본질이 흐려지고 있는 것이다.

분노해야 할 일은 따로 있다. 조주빈에 앞서 검거된 N번방의 또 다른 운영자 ‘켈리’(신 모씨, 32세)는 지난해 11월 1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검찰은 항소하지 않았고, 신 씨는 “형량이 무거워 부당하다”라고 주장하며 항소했다. 미성년자 성착취 영상을 제작한 또 다른 N번방 운영자 ‘왓치맨’은 동종의 범죄를 저지른 전력이 있음에도 검찰은 그에게 징역 3년 6개월을 구형했을 뿐이다.

조주빈은 물론 26만명 이용자들의 신상까지 공개해야 한다는 청원이 수 백 명의 공감을 얻고 있다. 그러나 현행법상 26만 명의 신상공개와 처벌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게 법조계의 중론이다. 조주빈 보다 먼저 법정에 선 켈리와 와치맨이 보여준 것처럼 재판부가 조주빈에 대한 판결을 기존의 판례에 의존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여론을 의식해 판례보다 중한 선고가 나오더라도 피해자가 끄덕일 수 있고,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처벌 수위는 아닐 것이다.

결국 관련법이 바뀌어야 한다. 이 법을 바꾸는 건 분노에서 시작된 국민의 목소리가 이성적으로 차분히 모아질 때다.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과 성범죄자들에 대한 중한 처벌, 이를 보장할 수 있는 제도, 장치적 마련에 집중해야 할 때다. 법을 바꾸는 원동력은 건강한 분노를 바탕으로 한 이성적 목소리다. 집중이 필요한 이 시기, 왜 우리의 분노는 엉뚱한 곳으로 흩어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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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브이데일리 김지현 기자 news@tvdaily.co.kr /사진=뉴시스,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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