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미치지 않고서야 [토요판]
2021. 08.28(토)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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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범죄·빈부격차…사각지대 고통의 범람
선한 휴머니즘은 공허한 판타지인가
2021년 오피스극, 생존의 새로운 정의 역설



[티브이데일리 이기은 기자] 일터의 직업관과 생존법을 특유 필체로 기록해낸 휴먼 드라마는 2021년의 시청자들에게 다각도로 비춰질 만하다. OTT(over the top) 계열 종사자 A씨(35, 女)는 영화·드라마 식견, 제작 비화 등 관련 데이터베이스가 풍부한 편이다. 그런 그는 “유일하게 시청을 망설이는 콘텐츠가 있다면 인간 군상이 녹아 든 오피스극일 것”이라며 “일상의 피로를 주말에도 간접 체험할 여력은 없다”라고 귀띔했다.

26일 종영한 MBC ‘미치지 않고서야’(극본 정도윤·연출 최정인) 주인공 최반석(정재영)은 윤태호 웹툰이자 동명 드라마 ‘미생’ 주인공 장그래 캐릭터의 중년 버전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최근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 경향을 증명하듯 프로그래머는 유독 몸값 높은 직종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이과 인력들의 고초도 뚜렷하다. 가령 사업부 세력은 공전 출신과는 일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며 이들의 특질을 폄하하기 일쑤다. 현재 44세 엔지니어 최반석은 직종 상 여전히 실무를 부여잡은 채 초등학생 자녀를 책임지고 있으며 몇 년 이내 희망퇴직도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급기야 “30% 하위 매출 제품은 경쟁력이 없기에 생산을 중단한다”는 극중 한명전자의 공식 입장은 ‘늙은 사람은 더 이상 이 사회에서 가치가 없다’는 무언의 전제와도 병치돼 있다. 때문에 극중 중년의 엔지니어 최반석은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안에서 낡아가는 부품의 은유다.

30대 최연소 개발팀장 한세권(이상엽)은 어떤 직장에서나 볼 법한 권모술수형 캐릭터다. 동료를 밟으며 올라가는 게 목표인 한세권은 나이 든 팀원 최반석의 전문성을 자신의 공으로 둔갑 시키는 처세 능력을 발휘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대로 밀려날 줄만 알았던 최반석의 반격이다. 최반석은 프로젝트 시연회에서 불안감을 느낀 한세권의 심리를 역이용해 상사 앞에서 기어코 세권의 지질한 고백과 사과를 받아냈다. 연륜은 헛되지 않았다는 방증일까. 젊은 호랑이 위에서 살아가는 늙고 조용한 늑대의 존재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그간 힘겹게 버텨온 세월을 상기하게 하는 드라마적 카타르시스를 이끌어냈다.

정도윤 작가는 2017년, 여성 검사 마이듬(정려원)을 주인공으로 세운 ‘마녀의 법정’에서 부장 검사에게 성추행을 당한 여기자의 피해 스토리를 그렸다. 극중 마이듬은 가해자를 징계위원회에 영리하게 고발했고 이는 정 작가의 정돈된 세계관으로 비춰졌다. 다음 해 서지현 검사의 ‘미투(Metoo, 나도 당했다)의 폭로전이 발발한 것은 현실이 드라마보다 잔혹하다는 점을 증명한다. 서 검사는 수 년 간의 용감한 싸움 끝에 지난 7월부터 법무부 디지털성범죄 대응 TF팀장으로 재직 중인데 이는 오늘날 생존의 새로운 정의를 가늠케 하는 측면이 있다.

월급을 받아 자기 육신을 보살피고 혈육을 먹여 살리는 생존은 가부장 과거 사회의 생존이었다. 무한 경쟁과 부동산·주식·수저론에 따른 빈부격차, 범죄는 근 몇 년 사이 한층 다층화됐으며 오늘날의 생존은 타인과 연대하는 장기 단계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웃이 뜻하지 않게 고통 받는 상황이 나와 가족의 울타리를 침범한다는 인식도 여론을 장악했다. 온라인 성 피해의 공론화에 더불어 일명 인터넷 포주들의 신상이 전 국민 앞에 공개되기도 한다. 이달 마포구 오피스텔에서 20대 여성 황예진 씨는 남자친구에게 심한 폭행을 당했고 끝내 사망에 이르렀다. 프로파일러 표창원은 남성이 분명 황예진 씨의 사망 가능성을 인식했을 것이라며 이를 미필적 고의로 요약한다. 비단 성별, 국가, 연령대, 경제력을 나누지 않더라도 누구든 사각지대에 놓일 수 있다는 증거다. 어째서일까. 인간은 가변적이며 예측 불가이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인격 또한 주변 환경에 따라 성장할 수도 퇴보할 수도 있다. 각 집단의 정체성도 조건에 따라 불균질할 수밖에 없다.

개중 이해관계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집단은 영리 추구 목적의 회사 내부다. 오피스극은 직장인들 간 약육강식을 부단히 묘사하되 이를 삶의 애환으로 눙칠 줄 아는 작품 윤리를 엄수한다. 하지만 현실 속 월요일이 썩 달갑지 않은 수 천 만의 한국 직장인들에게, 삶은 남 보기엔 평범해 보일지언정 각자에겐 속 시끄러운 고단함일 것이다.

어딘가엔 유년기부터 타고난 자원을 발판 삼아 탄탄대로를 지나온, 그렇기에 여유롭고 유능한 어른들이 존재한다.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극본 이우정·연출 신원호)가 세련된 의료 고증에도 불구하고 캐릭터 판타지 우려에 휩싸인 현 상황이 그렇다. 현재 일부 드라마 속 선한 봉합과 해피엔딩은 누군가에겐 먼 비현실일 따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이점도 쥐지 못한 채 마라톤의 척박한 시작점에 선다. 예기치 못한 시련 앞에서 누군들 비굴해지거나 날카로워지지 않을 수 있을까. 다만 누구나 한 번 쯤은 다짐한다. 미치지 않고서야, 최선의 정도(正道)를 걷기로 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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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브이데일리 이기은 기자 news@tvdaily.co.kr / 사진=MBC,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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